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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화를 위한 열정: 신앙인의 사도적 열정에 대한 교리 교육
9. 증인: 성 바오로 (1)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신앙인의 사도적 열정에 대한 교리 교육 여정을 이어가면서, 복음에 대한 열정이 무엇인지를 각기 다른 시대에 다른 방식으로 모범적인 증거를 남긴 몇몇 인물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살펴볼 첫 증인은 단연 바오로 사도입니다. 앞으로 두 차례의 교리 교육은 바오로 사도를 살펴보는 데 할애하고자 합니다.
타르수스의 바오로의 생애는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주제와 관련해 상징적입니다. 우리는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의 첫 번째 장과 사도행전이 전해주는 내용을 통해 바오로 사도의 복음에 대한 열정이 그의 회심 후에 나타나는 모습이자 앞서 유다교에 대한 그의 열정을 대신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유다교를 위한 모세의 율법에 열심한 사람이었고, 회심 후에도 이러한 열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알리기 위해 계속되었습니다. 바오로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바오로라고 불리기 전 사울이라고 불렸던 그는 이미 열성적인 사람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향한 그의 열성을 복음을 향한 열성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는 처음에 교회를 없애려고 했지만, 나중에는 교회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문해 봅시다. 그의 열성이 파괴에서 건설로 바뀌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가? 바오로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는가? 그의 인간적 열성이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열성으로 변했는가?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열정이 윤리적 관점에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며, 열정을 올바르게 사용하면 윤리적으로 좋은 것이 되고, 올바르지 않게 사용하면 나쁜 것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1] 바오로 사도의 경우 그를 변화시킨 것은 단순히 생각이나 신념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이를 잊지 마십시오.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것도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사울에게 있어서 그의 온 존재를 변화시킨 것은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바오로의 인성, 하느님과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그의 열정은 사라진 게 아니라 성령에 의해 변모되고 “변화”(convertita)되었습니다. 우리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으신 분은 오직 성령뿐입니다. 그러한 변화가 바오로의 삶의 모든 측면에서 일어났습니다. 성찬례 안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곧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사라지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열성은 남아 있지만 그것이 그리스도께 대한 열성으로 바뀝니다. 의미는 바뀌지만 열성은 동일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성과 특질과 특성으로 주님을 섬깁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것은 생각이나 관념이 아니라,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실제 삶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여러분을 내면에서부터 변화시켜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여러분의 얼굴을 바꾸는 화장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마음의 변화를 이루겠지만, 외양만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건 좋지 않습니다. (…) 화장한 그리스도인은 좋지 않습니다. 진정한 변화는 마음의 변화입니다. 이 변화가 바로 바오로 사도에게 일어났습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은 이해나 연구의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복음에 대한 이해나 연구도 필요하지만 그것이 복음에 대한 열정을 만들어내지는 못합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은 오히려 사울/바오로가 겪었던 “넘어짐과 부활”을 동일하게 겪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사도적 열정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원하는 만큼 모든 신학을 공부할 수 있고, 성경과 그 모든 것을 공부할 수 있으며, 무신론자가 되거나 세속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역사상 수많은 무신론자 신학자들이 존재했습니다! 공부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만 그것이 은총의 새로운 삶을 만들어내지는 못합니다. 실로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이 “영혼을 풍족하게 하고 또 만족시키는 것은 풍부한 지식이 아니라, 사물의 내용을 깊이 깨닫고 맛보는 것”[2]이라고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내면을 변화시키고, 다른 것을 알게 하고, 다른 것을 맛보게 하는 것들에 관한 문제입니다. 각자 생각해 봅시다. “당신은 신앙인인가요?” “저는 신앙인입니다.” “기도하나요?” “기도합니다.”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나요?” “그럼요, 노력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삶에서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나요?” “아, 아니요, 저는 교회가 시키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나요?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났나요?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나요? 복음을 읽거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다면 예수님이 누구신지 기억하나요?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종종 놓치는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바오로의 삶에 들어오셨던 것처럼 여러분 삶에 들어오셔서 모든 것을 변화시키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 대한 말을 듣곤 합니다. “저 사람 좀 봐, 비난을 받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좋은 사람이 되었네. (…)” 누가 그를 변화시켰나요? 예수님이십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여러분의 삶은 바뀌었나요? “아니요, 그냥 그렇습니다. 네, 조금은 (…)” 예수님께서 여러분 삶으로 들어오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삶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외형적으로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 삶으로 오셔야 여러분이 변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오로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러한 까닭에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재촉하고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성인, 성녀들에게도 같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분들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박해자에서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바오로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사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의롭다고 여겨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체포하고 심지어 스테파노의 경우처럼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지만,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고 자신이 “모독하고 학대하던 자”(1티모 1,13 참조)였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곧 스스로 “나는 그분을 모독하고 학대하던 자였다”고 말할 때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일종의 역설이 그에게서 일어난 점에 주목합시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아, 주님, 감사합니다! 저는 착한 사람이니 좋은 일을 하고 대죄를 짓지 않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이는 좋은 길이 아니라 자기만족의 길입니다. 그 길은 여러분을 의롭게 하지 않고 콧대만 높입니다. 콧대 높은 가톨릭 신자는 거룩한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 그저 콧대만 높이고 다니는 사람일 뿐입니다. 참된 가톨릭 신자, 참된 그리스도인은 내면에서 예수님을 모시고 자기 마음을 변화시키는 사람입니다. 오늘 여러분 각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드립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나는 예수님을 내 마음 안에 들어오시게 했는가? 아니면 그분을 가까이 두고도 내 마음 안으로 모시지 않은 것은 아닌가? 나는 예수님으로 인해 나 자신이 변화되도록 내어 맡겼는가? 아니면 예수님은 나에게 그저 하나의 생각, 하나의 신학일 뿐인가? (…)’ 열성이란,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바오로 사도처럼 불같은 정열을 느끼고,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사람들을 돕고, 선한 일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관념적으로 만난다면 그리스도교적 이데올로기로 남을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께 마음의 문을 연다면 말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관념이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을 만나도록 도와주시고, 그 예수님께서 우리 삶을 내면에서부터 변화시키시고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빕니다.
[1] 성 토마스 아퀴나스, 「진리론」, 제24문 7항 참조.
[2]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영신수련」, 일러두기,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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