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콘텐츠
청년교리
[2025년 희년 교리 교육] 우리의 희망이신 예수 그리스도
제2부 예수님의 생애: 비유들
9. 바르티매오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마르 10,49)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번 교리 교육에서는 예수님 삶의 또 다른 핵심, 바로 치유의 신비를 함께 바라보려 합니다. 여러분 마음 깊은 곳의 상처와 연약함, 앞길이 막막하여 발걸음조차 떼지 못하는 그 자리를 그리스도의 성심 앞에 온전히 맡겨 드리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의 간절한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시고 우리를 치유해 주시리라는 믿음으로 기도드립시다.
오늘 우리와 함께 걸을 인물은 절망의 한복판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서 만나신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마르 10,46-52 참조). 예리코라는 장소의 의미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한 마지막 여정을 해수면보다 낮은 도시, 마치 “저승”과도 같은 예리코에서 시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나락으로 떨어진 첫 사람 아담을, 곧 죄로 인해 추락한 우리 모두를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바르티매오라는 이름은 “티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그가 누군가와 맺은 관계 속에서 정의되는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철저히 고립된 채 살아갑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이름이 “영광의 아들” 또는 “존경받는 아들”이라는 의미도 지닌다는 사실입니다.[1] 이름이 곧 운명이요 정체성인 유다 문화에서 바르티매오는 자신의 이름이 약속한 삶과는 정반대의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들과 달리, 바르티매오는 한 자리에 묶여 있습니다. 복음사가는 그가 길가에 주저앉아 있다고 전합니다. 누군가의 손길이 그를 일으켜 세우고 다시 걸을 힘을 북돋아 주어야 할 상황입니다.
막다른 골목에 갇힌 듯한 절망적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바르티매오는 우리 내면에 잠들어 있는 생명력을 일깨우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는 비록 거지의 몸이었지만 구걸할 줄 알았고, 무엇보다 목청껏 외칠 줄 알았습니다! 마음 깊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면, 온 세상이 여러분을 비웃고 모욕하며 포기하라고 다그쳐도 끝까지 그것을 향해 달려가십시오. 진정 원한다면 멈추지 말고 계속 외치십시오!
마르코 복음이 전하는 바르티매오의 외침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는 동방 교회의 소중한 기도 전통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 기도를 우리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바르티매오는 눈이 멀었지만, 놀랍게도 다른 누구보다 또렷하게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알아보았습니다! 그의 간절한 외침이 울려 퍼지자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라 하십니다(49절 참조). 우리가 하느님께 부르짖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할 때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시기 때문입니다(탈출 2,23 참조).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만나시고도 곧바로 다가가지 않으신 것이 이상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바르티매오의 생명력을 되살리는 지혜로운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다고 믿어 주시고, 그에게 걸을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신뢰해 주셨습니다. 그 사람은 죽음 같은 절망에서 벗어나 새 생명으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무척 중요한 행동을 해야 했습니다. 바로 자신의 겉옷을 과감히 벗어던지는 일이었습니다(50절 참조).
거지에게 겉옷은 생존의 전부입니다. 그것은 추위를 막아주는 보온재요, 잠자리를 마련해 주는 집이며,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방패입니다. 율법조차 거지의 겉옷만큼은 보호해 주었습니다. 누군가 그것을 담보로 잡았다면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돌려주라고 규정했습니다(탈출 22,25 참조).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를 옭아매는 것은 바로 이런 겉보기 안전장치들입니다. 자신을 지키려고 둘러친 울타리가 오히려 우리의 발걸음을 막는 족쇄가 되어버립니다. 예수님께 나아가 치유의 은총을 받으려면, 바르티매오는 자신의 모든 연약함과 상처를 그분 앞에 숨김없이 드러내야 했습니다. 이것이 모든 치유 여정의 첫걸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신 질문도 의외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51절)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정말로 치유받기를 원하는지 확신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책임져야 할 짐이 두려워 아픈 채로 머물러 있기를 택하기도 합니다. 바르티매오의 대답은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는 ‘아나블레페인’(anablepein)이라는 동사를 씁니다. 이 말은 “다시 보다”라는 뜻이지만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다”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바르티매오는 단순히 시력을 되찾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자신의 존엄과 품위를 되찾고 싶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보려면 고개부터 들어야 합니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고개 숙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의 참된 가치를 되찾는 일 말입니다.
바르티매오와 우리 모두를 구원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시려고 치유해 주십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바르티매오에게 당신을 따르라고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며 자유롭게 길을 떠나라고 격려하십니다(52절 참조). 그런데 마르코는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고 전합니다. 바르티매오는 자발적으로 길이신 예수님을 따르기로 선택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우리의 아픔과 사랑하는 이들의 고통을 예수님께 맡겨 드립시다. 길을 잃고 헤매며 출구를 찾지 못하는 모든 이의 절망도 함께 가져갑시다. 그들을 대신해서도 목소리 높여 부르짖읍시다. 주님께서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시고 우리 곁에 머물러 주시리라는 것을 확고히 믿으며 나아갑시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