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콘텐츠
청년교리
번역 김호열 신부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 대한 교리 교육 10.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다시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 대해 살펴봅시다. 바오로 사도는 이 서간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불멸의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무엇입니까? 오늘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주제를 중점적으로 다뤄보겠습니다.
자유는 잃어버렸을 때 비로소 진정으로 그 소중함을 알게 되는 보화입니다. 자유롭게 사는 데 익숙한 우리 중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유는 종종 선물이나 보존해야 할 유산이라기보다 획득된 권리인 것처럼 보입니다. 자유라는 주제에 대해 수세기에 걸쳐 얼마나 많은 오해가 있었고 얼마나 많은 서로 다른 견해가 충돌해 왔는지요!
갈라티아 신자들의 경우,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알고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릇된 제안에 이끌려 자유에서 종살이로, 곧 해방시키시는 예수님의 현존에서 죄와 율법주의의 노예로 넘어가는 것과 같은 일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율법주의는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율법주의(legalismo)와 결의론(casistica)에서 피난처를 찾고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갈라 5,1) 아래 놓이지 않고, 세례를 통해 받은 자유 안에서 굳건히 남아 있으라고 초대합니다. 그는 당연히 자유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지녔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몇몇 - 그가 부르듯이 - “거짓 형제들”이 “우리를 다시 종으로 만들기 위하여,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엿보”(갈라 2,4)고, 우리를 다시 뒤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공동체에 몰래 들어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방해하는 설교는 결코 복음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펠라지우스적이거나 얀세니즘적 또는 이와 유사한 것일 수는 있지만 복음적이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의 이름으로 강요할 수 없으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누구도 노예로 삼을 수 없습니다. 자유는 세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자유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은 무엇보다도 긍정적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요한 복음서에서도 볼 수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의 호소는 무엇보다도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의 근원이신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두 가지 기본 기둥에 기초합니다. 첫째는 주 예수님의 은총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진리, 곧 그분 자신입니다.
첫째로, 자유는 ‘주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갈라티아 신자들이 받은 - 그들처럼 우리가 세례를 통해 받은 - 자유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열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모든 설교를 지난 삶의 속박에서 자신을 해방시키신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에게서 성령에 따른 새 생명의 열매가 나온다고 강조했습니다. 사실, 가장 참된 자유는 죄의 종살이에서 나오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못 박히시도록 내어 놓으시고, 종이 되신 바로 그곳 십자가에 하느님께서 인간 해방의 원천을 두셨습니다. 모든 자유, 곧 죽음까지도 벗어 던진 곳이 자유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끊임없이 놀라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의 신비입니다. 이 신비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신비는 살아내야 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요한 10,17-18).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죽음에 내맡기심으로써 완전한 자유를 실현하십니다. 그분은 그렇게 해야만 모든 사람을 위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바오로 사도는 직접 이 사랑의 신비를 체험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극히 담대한 표현으로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라 2,19). 바오로 사도는 주님과의 최고의 일치 행위 안에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선물인 자유를 받았다는 것을 압니다. 사실, 그는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갈라 5,24)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바오로 사도에게 얼마나 큰 활력을 주었는지, 예수님과의 친밀함이 얼마나 컸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있어 이 믿음이 부족하다고 느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오로 사도의 증거가 우리를 이 자유로운 삶에서 앞으로 나아가도록 격려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롭고, 자유로워야 하며, 율법과 이상한 것들의 노예로 돌아가지 않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자유의 두 번째 기둥은 ‘진리’입니다. 이 경우에도 신앙의 진리는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개인 삶의 일상적이고 전반적인 의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실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공부도 못하고 읽고 쓸 줄도 모르지만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잘 알아들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이들은 자신들을 자유롭게 하는 이러한 지혜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지혜는 세례와 함께 성령을 통해 들어온 그리스도의 지혜입니다. 예를 들어 위대한 신학자들보다 복음의 자유에 대해 위대한 증언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유는 그것이 한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고 선으로 인도하는 한에서 자유롭게 합니다. 진정으로 자유롭기 위해서는 심리적 차원에서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더 깊은 차원에서 우리 자신 안의 진리를 실현해야 합니다. 바로 거기, 마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열 수 있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지극히 그리스도교적인 단어인 ‘인퀴에투디네(inquietudine)’*에 대해 잠시 살펴봅시다. 우리는 ‘실존적 불안’이 전혀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항상 똑같은 모습으로 살고, 마음속에 아무런 움직임도 없습니다. 그들에겐 ‘찹찹하지 못한 마음’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우리 마음이 찹찹하지 못하다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고 계시다는 신호이고, 자유는 성령의 은총에서 오는 능동적인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저는 자유가 우리를 부단히 움직이게 해야 하며,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짐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실제로 그것이 무엇인지 점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진리와 자유의 길이 평생 지속되는 고된 여정이라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자유롭게 머물러 있는 것은 고된 일입니다. 힘듭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자유로워지기 위해 계속 정진합시다.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는 십자가에서 오는 사랑이 우리를 인도하고 떠받쳐주는 여정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에게 진리를 보여주고,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이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자유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우리를 즐겁게 하고,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편집주: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있어 ‘인퀴에투디네(inquietudine)’라는 단어는 맥락에 따라 ‘실존적 불안’의 측면에서 ‘찹찹하지 못한 마음’이나 하느님을 향한 ‘조바심’, ‘열망’, ‘끊임없이 움직이는 마음’, 부지런히 움직이는 ‘부단함’ 등 우리말로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용시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고, 임의 편집/변형하지 마십시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