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님과 함께하는 신앙생활 제35차 세계 젊은이의 날 교황님 담화문- 첫 번째 부분 (고통과 죽음 마주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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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143회 작성일 20-04-19 17:34본문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35차 세계 젊은이의 날 담화
(2020년 4월 5일)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14)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교회는 2018년 10월에 ‘젊은이, 신앙과 성소 식별’을 주제로 열린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정기 총회를 통하여 현대 세계에서 젊은이 여러분이 처한 상황과 여러분이 찾고 있는 삶의 의미와 목적, 그리고 여러분이 하느님과 맺는 관계에 대하여 성찰을 이어 나갔습니다. 저는 2019년 1월 파나마 세계청년대회에 모인 수많은 전 세계 젊은이들을 만났습니다. 세계주교대의원회의와 세계청년대회와 같은 행사들은 “함께 걸어감”이라고 하는 교회의 본질적 차원을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여정에서 중요한 시점에 이를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고 우리 삶 자체도 우리에게 새롭게 시작하라는 도전 과제를 부여합니다. 이러한 도전에서 젊은이 여러분은 전문가입니다! 여러분은 여행하며 새로운 곳에 가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저는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을 2022년에 있을 차기 국제 순례지로 선택하였습니다. 15세기와 16세기에 많은 선교사들을 포함한 수많은 리스본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예수님 체험을 다른 민족들과 국가들과 함께 나누고자 미지의 땅을 향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리스본 세계청년대회의 주제는 “마리아는 일어나 서둘러 길을 떠났다.”(루카 1,39 참조)입니다. 이에 앞서 두 해 동안, 저는 여러분과 함께 다음의 두 성경 구절에 관하여 묵상하고자 합니다. 2020년 주제는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14)입니다. 2021년 주제는 “일어나라. 나는 너를 네가 나를 본 것의 증인으로 선택한다.”(사도 26,16 참조)입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바와 같이, “일어나라.”라는 동사는 세 번의 세계 젊은이의 날 주제에 모두 들어 있습니다. 이 표현은 ‘부활하다.’와 ‘새로운 삶으로 일깨우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보낸 2018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권고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Christus Vivit)에도 이 표현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이 권고는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5차 정기 총회 최종 문서와 함께 여러분 삶의 길을 밝히는 등불로서 교회가 여러분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 두 문서가 이행되도록 그리고 청소년 사목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의 사명에 길잡이가 되도록 온 교회는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활기찬 노력이 리스본으로 가는 우리의 여정과 일치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이제 올해의 주제를 살펴봅시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14) 저는 이 복음 구절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에서 이미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습니다. “여러분이 내적 활력, 꿈, 열정, 희망, 관대함을 잃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죽은 아들 앞에서 그러하셨듯이 여러분 앞에 나타나시어, 부활하신 주님의 권능으로 이렇게 북돋워 주십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20항).
이 성경 구절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의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한 과부의 젊은 외아들의 장례 행렬과 마주치시는 장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에 빠진 이 여인을 가엾이 여기시어 그녀의 아들을 되살리시는 기적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일련의 말씀과 몸짓에 이어 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루카 7,13-14). 이러한 주님의 말씀과 몸짓에 대하여 잠시 묵상해 봅시다.
고통과 죽음 마주하기
예수님께서는 이 장례 행렬을 유심히 바라보십니다. 군중들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는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한 여인의 얼굴을 알아보십니다. 바라보시는 그분의 눈길이 새로운 삶의 원천인 만남을 가져옵니다.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의 눈길은 어떠합니까? 나는 주의 깊게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휴대 전화에 있는 수천 장의 사진이나 소셜 미디어의 프로필을 보듯이 대충 넘겨 봅니까? 우리는 얼마나 자주 사건들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 관망만 하고 맙니까! 때때로 우리는 우선 휴대 전화로 사진부터 찍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관련된 사람들과는 눈도 마주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위에서 그러나 때로는 우리 안에서도 죽음의 현실을 마주하곤 합니다. 이는 바로 육체적, 영적, 정서적, 사회적 죽음입니다. 우리는 이 현실을 깨닫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이 현실을 받아들일 뿐입니까? 삶을 되찾고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또한, 저는 여러분 또래가 경험하고 있는 이 모든 부정적인 상황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일부 젊은이들은 지금 이 순간만 즐기며, 더욱더 자극적인 체험에 빠져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롭게 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젊은이들은 아무 희망도 없다고 느끼기에 ‘죽음’의 상태에 있습니다. 한 젊은 여성이 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저는 무엇인가를 하려는 의욕도 일어설 용기도 잃어버린 친구들을 봅니다.” 안타깝게도, 우울증은 젊은이 사이에서도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떠한 경우에는 자신의 목숨을 끊고자 하는 유혹으로도 이어집니다. 무관심이 지배하는 가운데 사람들이 번뇌와 회한의 심연으로 함몰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들 영혼의 외침에 귀 기울이는 이 하나 없이 홀로 울고 있는 젊은이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대신에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떠한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자신만의 유쾌한 시간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의 초점 없고 무심한 눈길만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을 뿐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내면으로는 죽었는데도 자신이 살아 있다고 믿으면서(묵시 3,1 참조) 피상적인 것들에 자기 삶을 낭비합니다. 이들은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도 자신의 참다운 존엄에 맞갖게 자신을 드높이는 대신, 자신의 삶을 이미 밑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그저 작은 만족을 추구하며 ‘신나게 살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순간의 재미, 곧 지나가 버릴 다른 이의 관심과 애정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디지털 나르시시즘이 점점 더 만연해지면서 청년들과 성인들에게 똑같이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아마도, 돈을 벌고 자리를 잡는 것만이 삶의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여기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마치 숨 쉬듯 물질주의에 젖어 들었을 것입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러한 태도는 공허함과 좌절감만 키워서 결국 불행하고 의욕도 없고 권태로운 삶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부정적 상황들은 개인적 실패가 그 원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신경 쓰고 노력하던 어떤 일이 더 이상 잘 진행되지 않거나 바라던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을 때마다 우리는 개인적 실패감을 맛보게 됩니다. 학업이나 스포츠, 예술 등에 대한 우리의 포부가 꺾일 때 이러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꿈’이 깨져 버리면 죽은 거나 다름없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실패들은 모든 인간 삶의 일부입니다. 때로는 실패가 결국 은총이 될 수도 있습니다! 행복을 가져다주리라 기대한 것이 하나의 허상이며 우상이었음이 입증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우상은 우리의 전부를 요구합니다. 우상은 우리를 노예로 삼아 버리지만 정작 우리에게 되돌려 주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 우상은 희뿌연 먼지만 남긴 채 무너지고 맙니다. 우리를 사로잡던 우상을 무너뜨리는 실패라면, 물론 많은 고통이 따르겠지만, 괜찮은 실패입니다.
한 젊은이가 맞닥뜨릴 수 있는 육체적 또는 정신적 죽음의 상황들은 그 밖에도 많이 있습니다. 저는 중독, 범죄, 가난, 또는 중병을 떠올려 봅니다. 이 상황들에 대해서는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 보도록 맡깁니다. 또한 현재나 과거에 여러분 자신이나 여러분과 가까운 사람에게 그러한 ‘죽음’을 불러일으킨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이와 동시에 저는 여러분에게 복음에 나오는 젊은이가 사실은 죽었지만, 그가 살기를 바란 그분께서 그를 보셨기 때문에 다시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을 떠올려 보도록 당부합니다. 이와 똑같은 일이 오늘도 그리고 날마다 일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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